저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박현주
Photography by Jeremy M. K. Chon
영어로 ‘down to earth’라는 표현이 있다. 가식이나 허세가 없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수식어이다. 우리말로는 현실적이라는 말이 때때로 세속적이라는 말과 동일시 되어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피아니스트 박현주는 정말 ‘기분 좋게 down to earth한’ 사람이다. 인터뷰 내내 ‘이대로 써도 괜찮을까?’ 싶은 얘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에게서 묘하게도 전에 없는 친숙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예술가의 삶’보다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늘 어색하다는 박현주는, “피아노가 제 삶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무대에서 연주하다 죽고 싶다고도 하는데, 전 그건 아니거든요.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피아노에만 집중해요. 전 다른 것도 다 할 거예요.” 하며 웃는다.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데 유쾌하고 흥미롭다. 이렇게 혼자 듣기 아까운 그녀의 이야기를 에스카사에 담아보았다.
2017년-현재 Pittsburg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심사위원
2018년 듀케인대학교 Staff Pianist
2017년 American Protégé International Piano and Strings Competition 우승
2017년 듀케인대학교 매리 페퍼트 음악대학 ‘최고 연주자’ 과정 졸업
2014년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 박사 졸업
2013년 주미한국대사관 ‘한인 명예 장학금(The Korean Honor Scholarship)’ 장학생
2017년 5월, 뉴욕 카네기홀(Carnegie Hall)에서 2017 미국 프로테제 국제 피아노 현악 콩쿠르(American Protégé International Piano and Strings Competition) 우승자인 박현주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었다. 모든 음악인의 ‘꿈의 무대’로 불리는 그곳에 서니 많은 기억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한 걸음씩’의 결실일뿐 ‘예술가’는 아직이다
아침 7시,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지체 없이 방밖으로 나간다. 씻고 초간단 식사를 한 뒤, 터서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들 끝을 밴디지(bandage)로 꼼꼼히 감아 붙인다. 처음에 한두 손가락이었던 것이 연주일이 가까워질수록 열 손가락 가까이 늘어난다. 집에서 학교 연습실까지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하면, 잠시 숨을 고른 뒤 바로 연습을 시작한다.
점심시간과 중간중간 수업이 있거나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꼬박 8시간을 앉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 보면 아침에 붙인 밴디지는 어느새 너덜너덜해져 있고 몇몇 손가락 끝에서는 또 피가 스며 나온다. 저녁 6시 반, 연습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걸어온다.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과제, 수업 준비, 일상적 잔무 등을 마치고 11시가 되면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이 일과를 반복한다. 석,박사 과정 내내 주중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차가 있는데도 체력 관리를 이유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습실까지 열심히 걸어가 연습을 한다. 이렇게 피아니스트 박현주가 되었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긴 했죠. 그런데 저는 사실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게 너무 어색해요.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가 아니면 죽을 것 같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별로 예민하지도 않고, 피아노에만 집중하지도 못해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다해야 하니까요. 밥 먹으면 설거지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해야 하고요. 벼락치기를 못 하는 성격이라 늘 꾸준히 준비하는 것뿐이에요. 연주일이 가까워지면 조금 더 집중력을 보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예민해져서 삶을 송두리째 바치고 그러지는 않아요. 어떻게 보면 전 그다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닌 거죠.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앞에 거 해결하고, 앞에 거 해결하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자신은 예술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조차 어색하다는 그녀의 말이 역으로 ‘예술적인 사람’ 즉, ‘예술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예술가라 하면, 타고난 재능에 이끌려 자신의 삶을 오롯이 예술 자체를 추구하는 데 쏟아붓는 사람, 더불어 강한 개성과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세상’의 틀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있다.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통념을 규범화하여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의 열정이나 순수성을 폄하하는 우(愚)는 경계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박현주는 단지 한 발 앞에 다른 한발을 놓았을 뿐이라지만, 그녀의 남다르고 꾸준한 열심은 그 자체로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사랑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다만 ‘보통’의 삶 속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듯했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
“피아노를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전 제가 선택한 길에 책임을 졌을 거예요.” 피아니스트가 된 계기를 묻는 말에 대한 박현주의 답이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책임감이 좀 강한 편인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그녀가 ‘책임지는 수준’은 절대 평범하지 않아보인다.
원래는 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했다가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준다기에 ‘펜스테이트’(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로 갔어요.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사실 석사 때는 제가 제일 잘 한다고들 해서 살짝 기고만장했던 것 같아요. 본교생 중에서는 유일하게 (본교) 박사 과정으로 뽑히기도 했고요. 그런데 박사 과정으로 온 학생들은 정말 다 저보다 잘 치는 거예요. 열심히 하는데도 잘 안 되고, 그 애들의 음악성도 못 따라가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기도 죽고 그랬어요. 그래도 제가 한 선택이니 책임지고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박사 과정을 마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그녀의 목표는 오직 ‘최대한 제대로 많이 배우는 것’이었다. 학생일 때, 교수님께 레슨을 받을 수 있을 때 어려운 곡들을 최대한 많이 쳐 보자고 마음먹었다. 길고 힘든 곡이라도 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곡이면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쉴 새 없이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마치기까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의 졸업 연주는 그 후로 내내 음대 교수들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연주가 되었다. 지난했던 과정의 고단함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고, 책임을 다했다는 인증(人證)이었다. 그때를 회상하고 나서야 그녀가 말한다. “피아노가 안 좋았으면 그렇게 못 했을 거예요.”
성실한 학생에서 피아니스트로 거듭나기
졸업 연주 후의 보람과 뿌듯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현주는 갑상선 암판정을 받았다. 박사 과정 당시 심한 피로감에 잠시 갑상선 호르몬 이상 진단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암은 좀 갑작스러웠다. 다행히 초기여서 갑상선 제거 수술로 암 치료는 마쳤지만, 그 일로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달리기만 해서 걷는 시간이 좀 필요한 건가 싶었어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박사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가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제가 얻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밖에 얻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게 좌절감이라기보다는 열심히 살아야 그만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압박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마음에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건강을 잃고 보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그즈음, 음악에 대한 제 생각도 돌이켜 보게 됐어요. 공부하는 동안 제가 크게 배울 수 있겠다 싶은 곡들 위주로 연주하고 보니, 졸업하고 나서 연주회를 하려니까 제 레퍼토리 곡들이 다 너무 어려운 곡들인 거예요. 다시 준비할 엄두도 못 내고,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곡들이 많아서 연주회 레퍼토리를 짜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청중들 귀를 고려하지 않고 철저하게 나 자신만을 위한 곡들을 쳤구나’ 깨닫게 되었죠.
박현주가 자신이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게 어색하다고 하는 이유가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에 대한 그녀의 부정은 오히려 그녀가 이미 한 단계 성장했고 앞으로 더 성장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녀가 대학생이던 2006년, ‘음악춘추’(클래식 음악 잡지) 우수 신인 데뷔 연주회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곡의 기교에 치우친 잠깐의 눈부신 연주보다는 오랫동안 연습하며 쌓아온 깊이 있는 소리로 한 음마다 감동으로 전해지는 연주를 선사하고 싶다”고 했다.
“착실하면서도 정직한 연주자”가 당시 그녀가 정의하는 ‘피아니스트’였고, 학창 시절 내내 그 정의에 맞는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음악적 완성도와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음악을 통해 청중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청중들과 소통하는 무대에서 또 다른 제 모습을 보며 깨지기도 하고 다듬어지기도 하면서 발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연주할 때 제일 어려운 건, 작곡가의 의도와 ‘나’의 스토리를 조화시키는 거예요. 먼저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해서 곡의 의도를 청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작곡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습에 임하기 전에 작곡가의 생애와 친필 악보를 찾아보면서 그 곡에 담긴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그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색깔을 담아 연주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해요. 청중들이 작곡가의 의도를 공감하고 그 곡을 사랑할 수 있게끔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감할 수 있는 삶에서 나오는 공감할 수 있는 음악
‘공감’은 모든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자기만이 이해하고 만족하는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예술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예술가는 늘 어떻게 보는 이, 듣는 이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배우의 경우를 보면,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충분히 경험한 배우일수록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폭넓고 깊이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피아니스트 박현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넓은 음역 안에서 다양한 선율과 색깔을 한 번에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피아노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어요. 또 때로는 다른 악기들과 잘 어우러져 소리를 내고, 때로는 독주 악기를 서포트하여 빛나게 해 주는 게 우리의 인간관계와도 비슷하고요. 피아노 연주를 통해서 곡에 담긴 인생의 면면과 감정을 청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이 먼저 작곡가의 인생과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사람으로서 제 삶을 돌아보고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밖의 구경꾼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범한 희로애락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누리며 산다. 중학교 시절 만난 남편이 그녀를 찾아 미국까지 유학 와 준 덕에 결혼에 골인했고 예쁜 딸도 낳았다. 덕분에 남편과 딸의 지지와 응원 속에 듀케인대학교(Duquesne University) ‘최고 연주자 과정(Artist Diploma)’을 마치면서 피아니스트로서도, 교육자로서도 더욱 성장했다. ‘성실한 학생’을 졸업하고 이제는 아내와 엄마로서 ‘생활고’가 있는 ‘피아노 전공자’ –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피아노를 공부해서 피아노와 관련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 – 가 되었다며 웃는 그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본인의 연주회를 준비하며, 피츠버그 국제 피아노 콩쿠르(Pittsburg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아내, 엄마, 피아니스트 다 하려면 힘들겠다고 하자, “시간 여유는 없는데 마음의 여유는 예전보다 더 있어요.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내야 하니까 연습 시간이 줄긴 했어도 집중력은 더 생긴 것 같아요.”라며 할 만하다고 한다. 기본으로 가진 성실함에 풍성한 삶의 경험이 더해진 그녀의 연주는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을 공감케 하고 감동하게 할 것이다.
박현주는 요즘 5월에 있을 미국의 대표적 실내악 콩쿠르인 피쇼프 콩쿠르(Fischoff International Competition) 참가를 앞두고 맹연습 중이다. 생계수단으로 피아노를 한다며 웃던 그녀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간만에 순수하게 피아노 연주자로 연습 중인데요. 그러니까 숨을 좀 쉬겠더라고요.” 한다. 그녀가 말하는 ‘평범한’ 삶, 즉 무엇 하나 놓지 않고 모두 경험하고 챙기며 음악을 하는 삶이 가뜩이나 책임감 강한 그녀에게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억척스럽게 잘 해내온 것을 보면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된다.
피아노가 그녀에게 ‘삶의 일부분’일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 그 부분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아니스트다. 그럼에도 그녀가 “나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은, 아마도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라기 보다 ‘예술을 하는 보통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글 Juyoung Lee 정리 에스카사편집부
저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박현주
Photography by Jeremy M. K. Chon
영어로 ‘down to earth’라는 표현이 있다. 가식이나 허세가 없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수식어이다. 우리말로는 현실적이라는 말이 때때로 세속적이라는 말과 동일시 되어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피아니스트 박현주는 정말 ‘기분 좋게 down to earth한’ 사람이다. 인터뷰 내내 ‘이대로 써도 괜찮을까?’ 싶은 얘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에게서 묘하게도 전에 없는 친숙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예술가의 삶’보다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늘 어색하다는 박현주는, “피아노가 제 삶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무대에서 연주하다 죽고 싶다고도 하는데, 전 그건 아니거든요.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피아노에만 집중해요. 전 다른 것도 다 할 거예요.” 하며 웃는다.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데 유쾌하고 흥미롭다. 이렇게 혼자 듣기 아까운 그녀의 이야기를 에스카사에 담아보았다.
2017년-현재 Pittsburg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심사위원
2018년 듀케인대학교 Staff Pianist
2017년 American Protégé International Piano and Strings Competition 우승
2017년 듀케인대학교 매리 페퍼트 음악대학 ‘최고 연주자’ 과정 졸업
2014년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 박사 졸업
2013년 주미한국대사관 ‘한인 명예 장학금(The Korean Honor Scholarship)’ 장학생
2017년 5월, 뉴욕 카네기홀(Carnegie Hall)에서 2017 미국 프로테제 국제 피아노 현악 콩쿠르(American Protégé International Piano and Strings Competition) 우승자인 박현주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었다. 모든 음악인의 ‘꿈의 무대’로 불리는 그곳에 서니 많은 기억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한 걸음씩’의 결실일뿐 ‘예술가’는 아직이다
아침 7시,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지체 없이 방밖으로 나간다. 씻고 초간단 식사를 한 뒤, 터서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들 끝을 밴디지(bandage)로 꼼꼼히 감아 붙인다. 처음에 한두 손가락이었던 것이 연주일이 가까워질수록 열 손가락 가까이 늘어난다. 집에서 학교 연습실까지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하면, 잠시 숨을 고른 뒤 바로 연습을 시작한다.
점심시간과 중간중간 수업이 있거나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꼬박 8시간을 앉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 보면 아침에 붙인 밴디지는 어느새 너덜너덜해져 있고 몇몇 손가락 끝에서는 또 피가 스며 나온다. 저녁 6시 반, 연습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걸어온다.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과제, 수업 준비, 일상적 잔무 등을 마치고 11시가 되면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이 일과를 반복한다. 석,박사 과정 내내 주중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차가 있는데도 체력 관리를 이유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습실까지 열심히 걸어가 연습을 한다. 이렇게 피아니스트 박현주가 되었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긴 했죠. 그런데 저는 사실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게 너무 어색해요.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가 아니면 죽을 것 같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별로 예민하지도 않고, 피아노에만 집중하지도 못해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다해야 하니까요. 밥 먹으면 설거지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해야 하고요. 벼락치기를 못 하는 성격이라 늘 꾸준히 준비하는 것뿐이에요. 연주일이 가까워지면 조금 더 집중력을 보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예민해져서 삶을 송두리째 바치고 그러지는 않아요. 어떻게 보면 전 그다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닌 거죠.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앞에 거 해결하고, 앞에 거 해결하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자신은 예술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조차 어색하다는 그녀의 말이 역으로 ‘예술적인 사람’ 즉, ‘예술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예술가라 하면, 타고난 재능에 이끌려 자신의 삶을 오롯이 예술 자체를 추구하는 데 쏟아붓는 사람, 더불어 강한 개성과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세상’의 틀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있다.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통념을 규범화하여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의 열정이나 순수성을 폄하하는 우(愚)는 경계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박현주는 단지 한 발 앞에 다른 한발을 놓았을 뿐이라지만, 그녀의 남다르고 꾸준한 열심은 그 자체로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사랑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다만 ‘보통’의 삶 속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듯했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
“피아노를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전 제가 선택한 길에 책임을 졌을 거예요.” 피아니스트가 된 계기를 묻는 말에 대한 박현주의 답이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책임감이 좀 강한 편인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그녀가 ‘책임지는 수준’은 절대 평범하지 않아보인다.
원래는 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했다가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준다기에 ‘펜스테이트’(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로 갔어요.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사실 석사 때는 제가 제일 잘 한다고들 해서 살짝 기고만장했던 것 같아요. 본교생 중에서는 유일하게 (본교) 박사 과정으로 뽑히기도 했고요. 그런데 박사 과정으로 온 학생들은 정말 다 저보다 잘 치는 거예요. 열심히 하는데도 잘 안 되고, 그 애들의 음악성도 못 따라가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기도 죽고 그랬어요. 그래도 제가 한 선택이니 책임지고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박사 과정을 마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그녀의 목표는 오직 ‘최대한 제대로 많이 배우는 것’이었다. 학생일 때, 교수님께 레슨을 받을 수 있을 때 어려운 곡들을 최대한 많이 쳐 보자고 마음먹었다. 길고 힘든 곡이라도 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곡이면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쉴 새 없이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마치기까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의 졸업 연주는 그 후로 내내 음대 교수들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연주가 되었다. 지난했던 과정의 고단함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고, 책임을 다했다는 인증(人證)이었다. 그때를 회상하고 나서야 그녀가 말한다. “피아노가 안 좋았으면 그렇게 못 했을 거예요.”
성실한 학생에서 피아니스트로 거듭나기
졸업 연주 후의 보람과 뿌듯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현주는 갑상선 암판정을 받았다. 박사 과정 당시 심한 피로감에 잠시 갑상선 호르몬 이상 진단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암은 좀 갑작스러웠다. 다행히 초기여서 갑상선 제거 수술로 암 치료는 마쳤지만, 그 일로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달리기만 해서 걷는 시간이 좀 필요한 건가 싶었어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박사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가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제가 얻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밖에 얻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게 좌절감이라기보다는 열심히 살아야 그만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압박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마음에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건강을 잃고 보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그즈음, 음악에 대한 제 생각도 돌이켜 보게 됐어요. 공부하는 동안 제가 크게 배울 수 있겠다 싶은 곡들 위주로 연주하고 보니, 졸업하고 나서 연주회를 하려니까 제 레퍼토리 곡들이 다 너무 어려운 곡들인 거예요. 다시 준비할 엄두도 못 내고,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곡들이 많아서 연주회 레퍼토리를 짜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청중들 귀를 고려하지 않고 철저하게 나 자신만을 위한 곡들을 쳤구나’ 깨닫게 되었죠.
박현주가 자신이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게 어색하다고 하는 이유가 이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에 대한 그녀의 부정은 오히려 그녀가 이미 한 단계 성장했고 앞으로 더 성장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녀가 대학생이던 2006년, ‘음악춘추’(클래식 음악 잡지) 우수 신인 데뷔 연주회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곡의 기교에 치우친 잠깐의 눈부신 연주보다는 오랫동안 연습하며 쌓아온 깊이 있는 소리로 한 음마다 감동으로 전해지는 연주를 선사하고 싶다”고 했다.
“착실하면서도 정직한 연주자”가 당시 그녀가 정의하는 ‘피아니스트’였고, 학창 시절 내내 그 정의에 맞는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음악적 완성도와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음악을 통해 청중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청중들과 소통하는 무대에서 또 다른 제 모습을 보며 깨지기도 하고 다듬어지기도 하면서 발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연주할 때 제일 어려운 건, 작곡가의 의도와 ‘나’의 스토리를 조화시키는 거예요. 먼저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해서 곡의 의도를 청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작곡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습에 임하기 전에 작곡가의 생애와 친필 악보를 찾아보면서 그 곡에 담긴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그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색깔을 담아 연주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해요. 청중들이 작곡가의 의도를 공감하고 그 곡을 사랑할 수 있게끔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감할 수 있는 삶에서 나오는 공감할 수 있는 음악
‘공감’은 모든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자기만이 이해하고 만족하는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예술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예술가는 늘 어떻게 보는 이, 듣는 이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배우의 경우를 보면,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충분히 경험한 배우일수록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폭넓고 깊이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피아니스트 박현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넓은 음역 안에서 다양한 선율과 색깔을 한 번에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피아노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어요. 또 때로는 다른 악기들과 잘 어우러져 소리를 내고, 때로는 독주 악기를 서포트하여 빛나게 해 주는 게 우리의 인간관계와도 비슷하고요. 피아노 연주를 통해서 곡에 담긴 인생의 면면과 감정을 청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이 먼저 작곡가의 인생과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사람으로서 제 삶을 돌아보고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밖의 구경꾼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범한 희로애락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누리며 산다. 중학교 시절 만난 남편이 그녀를 찾아 미국까지 유학 와 준 덕에 결혼에 골인했고 예쁜 딸도 낳았다. 덕분에 남편과 딸의 지지와 응원 속에 듀케인대학교(Duquesne University) ‘최고 연주자 과정(Artist Diploma)’을 마치면서 피아니스트로서도, 교육자로서도 더욱 성장했다. ‘성실한 학생’을 졸업하고 이제는 아내와 엄마로서 ‘생활고’가 있는 ‘피아노 전공자’ –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피아노를 공부해서 피아노와 관련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 – 가 되었다며 웃는 그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본인의 연주회를 준비하며, 피츠버그 국제 피아노 콩쿠르(Pittsburg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아내, 엄마, 피아니스트 다 하려면 힘들겠다고 하자, “시간 여유는 없는데 마음의 여유는 예전보다 더 있어요.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내야 하니까 연습 시간이 줄긴 했어도 집중력은 더 생긴 것 같아요.”라며 할 만하다고 한다. 기본으로 가진 성실함에 풍성한 삶의 경험이 더해진 그녀의 연주는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을 공감케 하고 감동하게 할 것이다.
박현주는 요즘 5월에 있을 미국의 대표적 실내악 콩쿠르인 피쇼프 콩쿠르(Fischoff International Competition) 참가를 앞두고 맹연습 중이다. 생계수단으로 피아노를 한다며 웃던 그녀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간만에 순수하게 피아노 연주자로 연습 중인데요. 그러니까 숨을 좀 쉬겠더라고요.” 한다. 그녀가 말하는 ‘평범한’ 삶, 즉 무엇 하나 놓지 않고 모두 경험하고 챙기며 음악을 하는 삶이 가뜩이나 책임감 강한 그녀에게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억척스럽게 잘 해내온 것을 보면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된다.
피아노가 그녀에게 ‘삶의 일부분’일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 그 부분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아니스트다. 그럼에도 그녀가 “나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은, 아마도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라기 보다 ‘예술을 하는 보통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글 Juyoung Lee 정리 에스카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