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으로 인생과 철학을 말한다.
레고 미디엄 작가 Jaye Moon
▲ Bauhaus drawer, 2015
20대 초반의 나이로 뉴욕에 온 미대생 문재이는 고민이 깊었다. 아시안 이민자로서, 유학생 그리고 여성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고 다인종 사회 뉴욕에 발을 딛고 지내야 할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생각이 많았다. 이민자나 유학생, 여성이라면 대부분 안고 있는 고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기에 그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눈에 보이는 형체, 즉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하나가 더 있었다.
결국 그녀가 많은 생각 끝에 선택한 도구는 장난감인 레고였다. 지난 20여 년간 문재이는 레고를 이용한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래서 이제 그녀의 이름 앞에는 ‘레고 작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레고 작가’라는 명칭은 사람들에게 추억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장난감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작가와 첫 만남에도 친근함부터 먼저 느껴진다. 물론 그녀는 실제로도 친근하다. 그러나 그녀는 친근하다는 한정된 이미지를 벗어나 표현의 지형을 확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단순하고 규격화된 레고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패턴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보는 이에게 다른 표현을 전달하는 역할도 결국 작가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 2 story yellow building(interior) 2002
어린 시절 장난감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조립식 프라 모델, 소형 자동차 모형, 기차 등을 가지고 놀고 인형에 옷을 입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기억이 누구나 있다. 꼭 비싼 장난감이 없어도 그저 소박한 종이 옷 접기 만으로도 놀이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어린 시절이다. 그처럼 성별과 국적, 경제적 여건에 따라 놀 수 있는 장난감 종류는 달랐지만, 좋아하는 장난감을 하나 꼽는다면 대부분 주저 없이 ‘레고(Lego)’를 떠올릴 것이다.
1949년 덴마크의 한 완구업체가 소개한 이 플라스틱 장난감은 현재까지 7천억 조각 이상이 판매되며 남녀노소와 국적을 초월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레고. 문재이 작가는 마치 어린 시절 추억 하나를 꼭 붙잡아 두려는 듯이 레고를 미디엄으로 사용한 작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장난감으로 작품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프렛 미대에서 공부하고 졸업했던 1990년대 뉴욕 미술계는 전반적으로 다문화적, 인종적 그리고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건 미술계의 경향 이전에 제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정체성을 문화와 인종 등 인문학적 접근보다는 수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나름대로 제 예술 언어를 만들려고 했어요.
생각해보니 인종과 문화와 관계없이 편견 없이 가장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장난감이더라고요. 아직 어떤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기 전에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그중에서도 레고를 선택한 이유는 레고라는 게 본래 수학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성향을 배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로서 수학을 가장 중요한 작품의 내적 원리로 설정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수학적 원리에 몰입하게 된 동기는 뉴욕에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느낀 제 나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인지 제 작업에는 수학적인 개념이 많이 존재합니다. 추상적인 숫자의 개념을 물성화하여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모든 인간이나 각 문화도 수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그 기본 원리가 같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습니다.
수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장난감 재료를 통해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세계를 연결해 가는 과정을 하나의 패턴으로 표현한 거죠. 수학에서는 키 큰 사람 한 명, 작은 사람 한 명, 잘생긴 사람 한 명을 표현 할 때 그냥 세 사람이라고 명명됩니다. 수식어가 붙기 시작하면 논리적인 판단이 힘들어지는 원리이죠. 우리가 레고로 소통할 때 1x1, 1x2, 2x2 등등으로 표현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숫자가 갖는 보편성, 명쾌함, 단순함에 매력을 느꼈다. 그 속성을 레고라는 장난감을 통해 구현하는 작업을 한다.’ 그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작가님이 근본적으로 고민한 정체성의 문제와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거죠?
“숫자는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빼고 더해지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패턴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패턴은 우연과 즉흥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사회적, 문화적, 생물학적, 지정학적, 시대적 등 다양한 원리가 존재합니다. 똑같은 개수의 레고를 갖고 누구나 자기만의 형태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정체성이 그 숫자 안에 스며 있다’는 게 저의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도 주관적인 개성의 표현이 되는 것이죠. 그 숫자를 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보면서 이 기본 원리를 제 시각적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합니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의 작업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늘었음을 느낀다. 반면 더 궁금해진 것은 ‘왜 아티스트가 이렇게 인문학적인 고민을 깊게 해야 했나?’ 하는 것이다. 오해가 없도록 강조한다면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에 대한 조예나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작가의 고민은 새로운 실험과 끊임없는 습작을 통해 작품 자체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은 아니었을까? 예를 들면 추상 표현주의적 작품을 통해 인종과 국적, 언어를 넘어서는 의미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기자의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원래 고등학교 때 예술가가 아닌 철학자를 꿈꿨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도 제가 좀 이상한 아이로 여겨졌어요. 반항적이고 조숙하고. 이름이 문재이인데 ‘문제아’라고 불렸죠. 결국 미대를 갔지만, 미술 선생님이 미대를 권했을 때도 왠지 미대에 가는 아이들은 좀 얄팍하다고 여겼을 정도니까요.”
어린 시절 이런 성향은 초기 작품을 통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작가는 유학 초기에 노골적으로 성적인 표현을 포함해서 시각적인 충격을 지향하는 ‘쇼킹 밸류’ 컨텐츠 작업과 페미니즘적 오브제 작업에 전념했다. 자유로운 표현의 가능성이 확대된 뉴욕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작업에 접근 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93년 휘트니 뮤지엄 비엔날레를 본 이후다. 성적인 이미지와 쇼킹 밸류가 극치에 이르는 전시였다. 그가 추구하던 비쥬얼적인 충격은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고 신선한 충격도 아닌 심지어 ‘한물 간 사조’ 라고 느껴졌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초기 작가 시절에 어떤 작품을 추구해야 할지 고민도 깊으셨고 방황도 하셨는데 레고라는 미디엄을 발견한 뒤,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셨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레고를 이용해서 작업했던 초기였던, 1996년 이후에는 단순한 구조적 결합을 통해 미니멀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대표작인 월 시리즈(Wall)는 12인치의 한정된 캔버스에 레고로 디자인적 구성, 건축적 이미지, 미니멀한 선적 구성 등 여러 종류의 작업을 했지요. 2000년대에는 레고가 갖는 기성품(readymade) 요소를 중점으로 건축적이고 디자인된 가방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02년부터 가방 시리즈를 제작하였고 초기 작업은 색깔이 많이 들어갔어요. 2005년부터는 가방 시리즈를 형광 아크릴을 사용해 제작했는데 그해 첼시의 뉴만 갤러리(Newman Popiashvili Gallery) 전시가 공식적인 저의 뉴욕 데뷔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 전시의 성공으로 Art in America에도 리뷰가 실렸죠. 이후 제 작품은 가구 시리즈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010년부터 공공미술로서의 작업으로 확장했고, 현재는 설치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명하신 대로 오랜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지만, 문재이란 이름이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건 역시 공공 설치 작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첫 뉴욕 개인전을 할 때 갤러리에서는 제가 레고라는 미디엄으로 현대 라이프 스타일을 표현한 것에 대해 신선하게 생각했고 미술계에서도 신선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레고를 사용한다는 파격은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이 많았어요.
갤러리에서도 제가 계속 레고 작가로 인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작업을 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갤러리와 제가 2010년경부터 갈등을 겪으면서, 레고 작업을 갤러리와 무관하게 지속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하나의 수단으로 거리 미술을 택하게 되었던 거죠. 의외로 거리 미술 반응이 좋았고 저는 나름대로 번호 작업과 네온과 같은 다른 작업으로 작업을 확산시킴으로써 갤러리와의 관계가 지속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미술계에서는 제가 레고를 사용한 것을 단기간의 실험으로만 평가했고, 그것을 지속 가능한 예술가의 도구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제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 가능성에 도전한 것이 스스로 대견합니다.”
한국에서 거리의 나무에 레고 작업을 한 걸 사진으로 봤습니다. 레고라는 매체가 공공 설치물에 아주 잘 어울리는듯 합니다.
“아무래도 장난감이 주는 친근함과 시각적 즐거움이 큰 요소겠죠. 규격화된 레고는 수학적 법칙에 따라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그 형태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내죠. 대중의 참여에 따라 예측 할 수 없게 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저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삶도 기본적으로 어떤 구조적 기반과 사회 현상을 바탕으로 하나의 패턴으로 형성된다고 보죠.
규격화 된 레고는 언제 어디서 산 것이라도 누구든지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작업에 기증받거나 후원받는 장난감을 혼합하여 제작하고 전시가 끝난 후 일부를 재활용의 의미로 사회에 환원합니다. 레고란 장난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추억과 많은 공감대를 주는 매체입니다. 그래서 관객이 저의 작품에 참여 할 때 서로에게 연관성을 느끼게 되고 재활용의 의미를 통해 순환의 의미를 재인식하게 됩니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문화적, 언어적, 인종적 갈등을 넘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소통이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다주죠.”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심스레 들려줬다. 2015년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은 당연하리라. 실제로 재발 때문에 예정되었던 전시가 취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철학도를 꿈꿨던 조숙한 ‘문제아’ 문재이가 작가로서 자신의 불운을 대하는 태도는 역시 그녀다운 관조와 담담함이었다.
“저는 경험론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 모든 작업은 제가 새로운 경험을 할때마다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을 경험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졌지요. 죽음과 질병 역시 삶의 한 부분임에 익숙해졌지요. 지난봄, 뉴욕 Marisa Newman Projects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2년 반 전에 받은 수술이 문제가 생겨서 재수술했습니다. 다행이 지인 등 많은 분이 격려해 주셔서 올겨울까지 작업을 마무리하고 전시를 할 계획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저는 제가 경험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브릭을 사용해 설치 미술로 제작할 예정이에요.”
어렵게 다시 이루어진 올 겨울 전시를 꼭 성공적으로 치르시길 그리고 몸도 건강해지시길 바랍니다.
“격려와 응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제 작업이 어떤 전환점을 갖게 될지 또 어떻게 전개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그다음 문을 열 수 있듯이, 저에게도 앞으로 다가올 예측할 수 없는 많은 경험이 모두 저의 창작의 산물이 될 거로 기대합니다. 묵묵히 변화에 대응하면서, 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작업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아티스트로서의 삶이, 충격적인 경험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에 항상 감사하고 살고 싶네요.”
글 Won Young Park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
장난감으로 인생과 철학을 말한다.
레고 미디엄 작가 Jaye Moon
▲ Bauhaus drawer, 2015
20대 초반의 나이로 뉴욕에 온 미대생 문재이는 고민이 깊었다. 아시안 이민자로서, 유학생 그리고 여성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고 다인종 사회 뉴욕에 발을 딛고 지내야 할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생각이 많았다. 이민자나 유학생, 여성이라면 대부분 안고 있는 고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기에 그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눈에 보이는 형체, 즉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하나가 더 있었다.
결국 그녀가 많은 생각 끝에 선택한 도구는 장난감인 레고였다. 지난 20여 년간 문재이는 레고를 이용한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래서 이제 그녀의 이름 앞에는 ‘레고 작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레고 작가’라는 명칭은 사람들에게 추억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장난감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작가와 첫 만남에도 친근함부터 먼저 느껴진다. 물론 그녀는 실제로도 친근하다. 그러나 그녀는 친근하다는 한정된 이미지를 벗어나 표현의 지형을 확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단순하고 규격화된 레고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패턴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보는 이에게 다른 표현을 전달하는 역할도 결국 작가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 2 story yellow building(interior) 2002
어린 시절 장난감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조립식 프라 모델, 소형 자동차 모형, 기차 등을 가지고 놀고 인형에 옷을 입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기억이 누구나 있다. 꼭 비싼 장난감이 없어도 그저 소박한 종이 옷 접기 만으로도 놀이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어린 시절이다. 그처럼 성별과 국적, 경제적 여건에 따라 놀 수 있는 장난감 종류는 달랐지만, 좋아하는 장난감을 하나 꼽는다면 대부분 주저 없이 ‘레고(Lego)’를 떠올릴 것이다.
1949년 덴마크의 한 완구업체가 소개한 이 플라스틱 장난감은 현재까지 7천억 조각 이상이 판매되며 남녀노소와 국적을 초월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레고. 문재이 작가는 마치 어린 시절 추억 하나를 꼭 붙잡아 두려는 듯이 레고를 미디엄으로 사용한 작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장난감으로 작품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프렛 미대에서 공부하고 졸업했던 1990년대 뉴욕 미술계는 전반적으로 다문화적, 인종적 그리고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건 미술계의 경향 이전에 제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정체성을 문화와 인종 등 인문학적 접근보다는 수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나름대로 제 예술 언어를 만들려고 했어요.
생각해보니 인종과 문화와 관계없이 편견 없이 가장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장난감이더라고요. 아직 어떤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기 전에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그중에서도 레고를 선택한 이유는 레고라는 게 본래 수학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성향을 배제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로서 수학을 가장 중요한 작품의 내적 원리로 설정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수학적 원리에 몰입하게 된 동기는 뉴욕에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느낀 제 나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인지 제 작업에는 수학적인 개념이 많이 존재합니다. 추상적인 숫자의 개념을 물성화하여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모든 인간이나 각 문화도 수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그 기본 원리가 같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습니다.
수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장난감 재료를 통해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세계를 연결해 가는 과정을 하나의 패턴으로 표현한 거죠. 수학에서는 키 큰 사람 한 명, 작은 사람 한 명, 잘생긴 사람 한 명을 표현 할 때 그냥 세 사람이라고 명명됩니다. 수식어가 붙기 시작하면 논리적인 판단이 힘들어지는 원리이죠. 우리가 레고로 소통할 때 1x1, 1x2, 2x2 등등으로 표현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숫자가 갖는 보편성, 명쾌함, 단순함에 매력을 느꼈다. 그 속성을 레고라는 장난감을 통해 구현하는 작업을 한다.’ 그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작가님이 근본적으로 고민한 정체성의 문제와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거죠?
“숫자는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빼고 더해지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패턴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패턴은 우연과 즉흥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아요. 사회적, 문화적, 생물학적, 지정학적, 시대적 등 다양한 원리가 존재합니다. 똑같은 개수의 레고를 갖고 누구나 자기만의 형태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정체성이 그 숫자 안에 스며 있다’는 게 저의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도 주관적인 개성의 표현이 되는 것이죠. 그 숫자를 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보면서 이 기본 원리를 제 시각적 언어로 재해석하고자 합니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의 작업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늘었음을 느낀다. 반면 더 궁금해진 것은 ‘왜 아티스트가 이렇게 인문학적인 고민을 깊게 해야 했나?’ 하는 것이다. 오해가 없도록 강조한다면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에 대한 조예나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작가의 고민은 새로운 실험과 끊임없는 습작을 통해 작품 자체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은 아니었을까? 예를 들면 추상 표현주의적 작품을 통해 인종과 국적, 언어를 넘어서는 의미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기자의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원래 고등학교 때 예술가가 아닌 철학자를 꿈꿨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도 제가 좀 이상한 아이로 여겨졌어요. 반항적이고 조숙하고. 이름이 문재이인데 ‘문제아’라고 불렸죠. 결국 미대를 갔지만, 미술 선생님이 미대를 권했을 때도 왠지 미대에 가는 아이들은 좀 얄팍하다고 여겼을 정도니까요.”
어린 시절 이런 성향은 초기 작품을 통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작가는 유학 초기에 노골적으로 성적인 표현을 포함해서 시각적인 충격을 지향하는 ‘쇼킹 밸류’ 컨텐츠 작업과 페미니즘적 오브제 작업에 전념했다. 자유로운 표현의 가능성이 확대된 뉴욕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작업에 접근 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93년 휘트니 뮤지엄 비엔날레를 본 이후다. 성적인 이미지와 쇼킹 밸류가 극치에 이르는 전시였다. 그가 추구하던 비쥬얼적인 충격은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고 신선한 충격도 아닌 심지어 ‘한물 간 사조’ 라고 느껴졌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초기 작가 시절에 어떤 작품을 추구해야 할지 고민도 깊으셨고 방황도 하셨는데 레고라는 미디엄을 발견한 뒤,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셨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레고를 이용해서 작업했던 초기였던, 1996년 이후에는 단순한 구조적 결합을 통해 미니멀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대표작인 월 시리즈(Wall)는 12인치의 한정된 캔버스에 레고로 디자인적 구성, 건축적 이미지, 미니멀한 선적 구성 등 여러 종류의 작업을 했지요. 2000년대에는 레고가 갖는 기성품(readymade) 요소를 중점으로 건축적이고 디자인된 가방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02년부터 가방 시리즈를 제작하였고 초기 작업은 색깔이 많이 들어갔어요. 2005년부터는 가방 시리즈를 형광 아크릴을 사용해 제작했는데 그해 첼시의 뉴만 갤러리(Newman Popiashvili Gallery) 전시가 공식적인 저의 뉴욕 데뷔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 전시의 성공으로 Art in America에도 리뷰가 실렸죠. 이후 제 작품은 가구 시리즈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010년부터 공공미술로서의 작업으로 확장했고, 현재는 설치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명하신 대로 오랜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지만, 문재이란 이름이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건 역시 공공 설치 작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첫 뉴욕 개인전을 할 때 갤러리에서는 제가 레고라는 미디엄으로 현대 라이프 스타일을 표현한 것에 대해 신선하게 생각했고 미술계에서도 신선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레고를 사용한다는 파격은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이 많았어요.
갤러리에서도 제가 계속 레고 작가로 인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작업을 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갤러리와 제가 2010년경부터 갈등을 겪으면서, 레고 작업을 갤러리와 무관하게 지속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하나의 수단으로 거리 미술을 택하게 되었던 거죠. 의외로 거리 미술 반응이 좋았고 저는 나름대로 번호 작업과 네온과 같은 다른 작업으로 작업을 확산시킴으로써 갤러리와의 관계가 지속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미술계에서는 제가 레고를 사용한 것을 단기간의 실험으로만 평가했고, 그것을 지속 가능한 예술가의 도구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제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 가능성에 도전한 것이 스스로 대견합니다.”
한국에서 거리의 나무에 레고 작업을 한 걸 사진으로 봤습니다. 레고라는 매체가 공공 설치물에 아주 잘 어울리는듯 합니다.
“아무래도 장난감이 주는 친근함과 시각적 즐거움이 큰 요소겠죠. 규격화된 레고는 수학적 법칙에 따라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그 형태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내죠. 대중의 참여에 따라 예측 할 수 없게 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저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삶도 기본적으로 어떤 구조적 기반과 사회 현상을 바탕으로 하나의 패턴으로 형성된다고 보죠.
규격화 된 레고는 언제 어디서 산 것이라도 누구든지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작업에 기증받거나 후원받는 장난감을 혼합하여 제작하고 전시가 끝난 후 일부를 재활용의 의미로 사회에 환원합니다. 레고란 장난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추억과 많은 공감대를 주는 매체입니다. 그래서 관객이 저의 작품에 참여 할 때 서로에게 연관성을 느끼게 되고 재활용의 의미를 통해 순환의 의미를 재인식하게 됩니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문화적, 언어적, 인종적 갈등을 넘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소통이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다주죠.”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심스레 들려줬다. 2015년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은 당연하리라. 실제로 재발 때문에 예정되었던 전시가 취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철학도를 꿈꿨던 조숙한 ‘문제아’ 문재이가 작가로서 자신의 불운을 대하는 태도는 역시 그녀다운 관조와 담담함이었다.
“저는 경험론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 모든 작업은 제가 새로운 경험을 할때마다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암이라는 질병을 경험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졌지요. 죽음과 질병 역시 삶의 한 부분임에 익숙해졌지요. 지난봄, 뉴욕 Marisa Newman Projects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2년 반 전에 받은 수술이 문제가 생겨서 재수술했습니다. 다행이 지인 등 많은 분이 격려해 주셔서 올겨울까지 작업을 마무리하고 전시를 할 계획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저는 제가 경험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브릭을 사용해 설치 미술로 제작할 예정이에요.”
어렵게 다시 이루어진 올 겨울 전시를 꼭 성공적으로 치르시길 그리고 몸도 건강해지시길 바랍니다.
“격려와 응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제 작업이 어떤 전환점을 갖게 될지 또 어떻게 전개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그다음 문을 열 수 있듯이, 저에게도 앞으로 다가올 예측할 수 없는 많은 경험이 모두 저의 창작의 산물이 될 거로 기대합니다. 묵묵히 변화에 대응하면서, 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작업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아티스트로서의 삶이, 충격적인 경험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에 항상 감사하고 살고 싶네요.”
글 Won Young Park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