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 콘서트 무대를 준비하는
신이 허락한 목소리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내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POPERA CASTRATO
SEHUN JUNG
대한민국 최초 팝페라 가수로 최정상에 섰던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그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마치 꿈을 꾼 듯 유명해졌고 연극과 같은 삶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신이 허락한 그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팝페라는 '팝(pop)'과 '오페라(opera)'의 합성어로, 오페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대중화한 오페라를 가리킨다. 정세훈은 기계음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로 여성의 음성과 남성의 음성 모두를 완벽히 표현한다. 대중은 신비로운 그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 정세훈을 찾는 이가 점점 늘어나자 그는 자신을 돌아보거나 쉴 틈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은 듯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의 유명한 대사를 통해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다. 어떤 이는 일생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고 말했다. 정세훈에게도 7막에 걸친 인생길을 가려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신의 암시였을까? 한 번뿐인 인생은 내가 선택한다지만, 어느 날 스타가 되었듯이 때로는 뜻하지 않게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듯 무심하게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소중함이 더 빛나는 게 인생이다.
신은 멈출 줄 모르는 정세훈에게 잠시 쉼을 허락했다. 물론 유명세를 치른 고통은 몸무게가 10킬로 이상이 빠져나갈 정도로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 온 뒤 굳어진 땅처럼 그는 시련과 고통을 겪은 뒤 더 단단해졌다. 작년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상해사범대 음악대학 객원교수가 됐다. 내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단독 콘서트도 가질 예정이다. 7월 중순, 예술의 전당 무대를 앞두고 뉴욕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만나 지난 얘기를 나눠보았다.
제1막 오늘의 정세훈이 있기까지
“소름이 돋았다.”, “환상적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 정세훈의 공연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 2001년 12월 정세훈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역으로 데뷔하여 2004년 1집 정규앨범 Comfort, 2005년 크리스마스 앨범, 2008년 2집 정규앨범 NeoClassic을 발매한 뒤, 대한민국에 팝페라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오페라 아리아부터 뮤지컬,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는 음악적 역량을 지닌 정세훈을 언론에서는 한국의 ‘파리넬리’라 불렀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뒷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남자가 내는 여성 음색으로 팝페라 열풍을 일으키신 게 쉽지 않은 일이셨을 듯합니다.
“지금도 생소하지만, 제가 대학을 다닐 때도 카운터테너나 카스트라토라는 단어조차도 생소했거든요. 그나마 영화 ‘파리넬리’가 나와서 ‘남자도 저런 목소리가 나는구나.’ 겨우 이해하는 정도였어요. 대학교 때 합창 클래스 시간에 여성 단원들 목소리가 고음에서 못 나오면 제가 그냥 장난삼아서 냈는데 여자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선배나 동료들이 우스갯말로 재수 없다고 했어요. 이렇듯 국내에서는 제목소리가 인정을 못 받았지요. 그런데 토론토에 유학을 가서는 이 소리로 어디서든 노래를 불렀어요. 지하철도 예외는 아니었죠.
본래 ‘내가 노래를 잘하는구나!’ 착각하는 공간이 목욕탕이랑 지하철이거든요. 소리가 울려서 들리고 노래를 못해도 잘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래서 몰래 ‘아베마리아’나 ‘울게 하소서’를 부르면 캐나디안이 막 달려와요. 그리고는 묻죠. ‘여기서 누가 노래한 거냐’고. 그러면 전 천연덕스럽게 ‘아니 난 모른다’ 시침을 뗐어요. 만일 남자 목소리였으면 ‘아 이 사람이었겠구나.’ 했겠지만 생긴 건 분명 남잔데, 나오는 건 여자 목소리니까 더는 안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가면 저 혼자 흥얼거리면서 또 노래하죠.
그럼 또 오고…. 결국 내가 부른 걸 알고 나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I don’t believe it!” 하더라고요. 제 목소리를 들으신 국내분과 외국 분이 받는 느낌이 달라요. 국내분들은 카운터테너나 저의 목소리에 대해서 ‘신비롭다’라거나 ‘신기하네’ 정도지만, 유럽이나 미국 같은 국외에서 노래하면 신비롭기도 하지만, 동양 사람의 소리를 경이롭게 생각하는 이점이 있더군요.”
정세훈은 노력하는 카스트라토? 카운터테너? 정확히 어떤 목소리죠?
“카스트라토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신의 축복인 거죠. 저 같은 경우는 가성이 아니라 진성에 의해 나오는 목소리에요. 카운터테너(영어: countertenor)는 여자 음역인 콘트랄토나 메조소프라노 음역을 노래하는 남자 성악가를 말합니다. 저는 여성 알토의 음역에 해당하는 부드러운 테너의 음성을 지닌 카운터테너만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도 내기 때문에 ‘팝페라 카스트라토’라는 명칭을 쓰고 있습니다.”
캐나다 유학 시절부터 꽃을 피운 목소리라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노래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까지 성악을 공부했어요. 유학을 다녀와서 최고의 성악가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3대째 기독교 집안이어서 가스펠(gospel)을 공부하기로 맘먹고 캐나다로 갔어요. 그런데 운명이 참 묘해요. 제가 토론토에 도착하자, 가스펠 학교가 재정상 문제로 문을 닫은 겁니다. 캐나다에 계속 머물러야 하나 돌아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캐나다 가요제’에 나갔어요. ‘꽃밭에서’를 불러서 대상을 받았죠. 그 일이 제 인생의 시발점이 된 겁니다. 같이 입상했던 친구 중 하나가 JK 김동욱이었어요.”
제2막 최정상의 정세훈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 곡에 특별한 애정이 있으신 듯해요. “가요제 대상을 받고 나자 사람들한테 없는 걸 내가 가지고 있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계속 이 길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고민이 됐어요. 대부분 클래식 하는 사람이 갖는 착각인데 자기 소리가 최고라고 생각하죠. 어려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서인지 객관적으로 보질 못해요. 내 소리가 상대방에게도 정말 좋은지 객관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거든요.
아무튼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를 녹음해서 서울대 음대 김인혜 교수님한테 보냈어요. ‘내가 이런 소리를 가졌는데 이쪽으로 계속 가야 할지 고민이 많으니 조언을 해주세요.’ 라는 편지도 넣었죠. 그런데 ‘특이하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답이 왔어요. 그때 마침 가요제 부상으로 받은 게 항공권이었어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간단히 짐을 챙기고 한국으로 가서 김인혜 교수님을 만나고 레슨을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친하게 지내지만, 그때만해도 무척 어려운 분이셨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고맙게도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는 카운터테너를 지도하실 선생님이 없으니 유학이나 바로 활동을 해라’고 하셨어요.
저는 내심 대학원을 편입해서 선생님께 배우면 어떨까 생각을 했었는데 선생님께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지도할지, support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던 중에 운이 좋게도 ‘오페라의 유령’ Raoul 역인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었어요.”
‘정세훈’ 인생의 절정기가 시작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얘기를 더 해주시죠.
“저에겐 운명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절 아껴주시는 모 교수님이 ‘너는 남자 목소리도 좋으니까 라울 백작 오디션 한번 봐봐’ 하셨어요. 오디션을 봤는데 느낌이 좋더군요. 바로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었어요. 2001년 12월의 일입니다. 그 뒤부터 제 생활 패턴이 바뀌더군요. 바로 서울 음반과 계약을 맺고, 앨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도 제 무모한 용기가 또 고개를 들었어요. 처음 나온 앨범이 맘에 안 들더군요.
당시 내노라하는 작사, 작곡가가 만들어서 노래는 사실 듣기 좋았어요. 그런데 전 ‘이건 아니다. 이건 정세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요에다 아무 목소리만 얹어도 되는 거라서 팝페라가 아니다. 그러니 나한테 ‘프로듀서 권한을 주던지 날 놓아달라’고 얘기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건방을 떤 거죠. 지금은 오페라도 공연이나 뮤지컬 공연도 많지만, 당시는 활발하지는 않았어요.
우리나라 대형 뮤지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게 오페라의 유령이에요. 그 공연이 6개월 동안 대박이 나고 흥행을 하고 뮤지컬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라서 부린 호기라고 할까요?”
대박을 터트린 1집 Comfort, 2집 Neo Classic 앨범 얘기 좀 들려주시죠.
“서울 음반에서 쿨하게 내보내 주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음반입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래서 제 음악을 좋아했던 분이 1집을 프로듀서 해서 소위 대박이 났습니다. 컴포트(Comfort)앨범은 아직도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으니까요. 드라마 OST부터 해서 클래식 차트 1위 크로스오버 팝페라 차트 1위. 1위란 1위는 다 쓸어 담았으니 확실한 대박이죠. 2집 역시 과분하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2집 Neo Classic에 수록된 뮤지컬 넘버 "All I ask of you"에서 라울과 크리스틴을 동시에 소화해 냈는데 고맙게도 아직도 세계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곡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는 다른 분이 부른 걸 들어도 정세훈이 연상됩니다.
“뉴욕 2005년도에 카루소 재단으로부터 ‘세계를 위한 천사의 목소리 상’을 받게 해준 곡이 ‘울게하소서’예요. 또 제가 카스트라토의 길을 걷게 해준 곡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죠. 많은 분이 사랑해 주시는 곡이기도 하고요. 이 곡 외에도 앨범에 들어있던 모든 노래가 다 애정이 가요. 그중에서도 ‘정세훈’ 하면 ‘아베마리아’나 ‘울게 하소서’를 떠올리시는 분이 많으셔서 더 자주 부르게 됩니다.
팝페라라는 장르가 말 그대로 팝과 오페라이기 때문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분과 아닌 분까지도 다 만족시켜야만, ‘진정한 팝페라’, ‘크로스오버’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요에다가 클래식 목소리만 얹는다고 팝페라가 아닌 거죠.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트랙에 거는 순간,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끝났다는 평가도 받았어요. 모든 게다 잘 맞아떨어져서 성공한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제3막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
오후에 있을 뉴욕 공연 리허설로 바쁜 와중에 잠시 전화로 이뤄진 인터뷰는 얼굴을 대하며 진행하는 것보다 더 진솔했다. ‘예술의 전당’ 공연에 맞춰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몸과 마음이 바쁜 그 였지만, 최선을 다해 기자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휴대전화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대한 열정만큼, 상대에 대한 배려심은 차고 넘쳤다. 부모님에게 배운 타고난 겸손이었다. ‘언론에 나왔다고 다 진실은 아니다’라는 전제로 그가 겪었던 ‘지난 사건’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이젠 다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그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세상을 떠나고 싶더군요.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건, 일반인이 겪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공인으로서 받아야 하는 고통과 시선은 상상 이상으로 더 크거든요.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벌써 전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인 기피증과 우울증으로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가장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을 때 모든 걸 다 잃었다는 상실감은…… (그의 말소리는 자주 끊어지고…. 생각에 젖는 게 느껴졌다. 공연한 질문을 했구나 싶었다.)정말…… 모든 걸 다 잃었죠. 어찌하건 일어서 보려고 저 자신을 다독였어요. 그러나 일어서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절 고꾸라지게 만들더군요. 출연 요청을 받은 프로에서 세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 음악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고통은 제가 지고 갈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마음먹으니 그때부터 편해졌어요. 당시 새 앨범 ‘네오 클래식’이 발매됐지만, 한국 활동을 다 접고 프랑스·일본 등에서 공연을 하면서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세계를 다니다 보니 국내 기사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더군요.”
어머니 그리고 내 노래를 사랑하는 팬클럽 ‘꿈꾸는 섬’
“어머니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하신 분입니다.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제 길을 가도록 도와주셨죠. 또 팬클럽 ’꿈꾸는 섬’ 카페 분들의 응원은 큰 위로가 됐어요. 계약 때문에 일본에서만 공연할 수밖에 없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보통 때 73kg이던 몸무게가 63kg까지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젤 힘들 때 팬들이 일본까지 와서 맨 앞에 앉아 응원해주고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음악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죠.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노력했어요. 다시 바닥부터 간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보니좋은 일이 하나둘씩 생기더라고요.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제4막 끝나지 않은 그의 인생, 새 막이 열리다
영영 다시는 노래를 못 할 줄 알았다는 정세훈. 그가 다시 일어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상해 사범대 즉 우리나라의 국립대 음대 초빙교수 격인 객좌교수가 되었다. 외국인이 국립대 초빙교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시진핑 주석의 부인인 가수 펑리위안 여사와 정세훈 둘 뿐이라고 한다.
외국인 최초 중국 국립대음대 객좌교수가 되셨습니다. 과정을 듣고 싶군요.
“중국에는 경극이라는 전통공연이 있어요. 중국인들이 무척 좋아하죠. 경극 배우들이 내는 소리가 고음이거든요. 새소리처럼 내는 러시아가수가 중국에서 그 음성으로 이미 성공을 했어요. 그런데 노래가 아니고 괴성에 가까우니까 노래를 하는 저를 필요로 한 겁니다. 중국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경극을 현대화하는 중에 적합한 사람을 찾은 거죠. 제가 경극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는 소문이 나서 중국 북경과 상해 대학 두 군데서 연락이 왔어요.
시대가 변했어요. 예전엔 교수가 되려면 박사를 취득해야 하고 어렵게 되는데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스카우트했다고 학교 측에서 얘기하더군요. 고음을 내는 남성이 장르를 어떻게 크로스오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대중화할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교수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연락이 왔을 때 대신 조건을 맞춰달라고 했어요. 학교 측에서 학교에 상주하거나 한 달에 몇번씩 갈 수는 없다는 제 요구를 다 들어주더군요.”
인간미가 넘치고 사람 좋아하는 정세훈 곁에는 유독 친구가 많다
“팝페라도 클래식컬한 공연이니 지루해요. 그래서 늘 노력하죠. 부드러움 속에 때로는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고음으로 감동을 선사하고 싶어요. 신이 저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음성으로 위로를 드리고 상처받은 영혼엔 치유의 경험도 드리고 싶거든요. 전 제 공연에 오시는 분들에게 전율이 오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웃음도 드리고 싶어요. 가끔 감동보다는 웃음으로 관객을 쓰러뜨리기도 하죠. 이런 저를 친구나 지인들은 개그맨이라고 해요. 이런 철부지 행동 때문인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좀 많은 편입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나 꿈은 무엇입니까?
“정말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한 일 년 동안만이라도 세계 곳곳에 소외되고 문화적인 생활을 접하기 어렵고 생활이 힘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다니면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 음악으로 그분들에게 힐링을 드리고 싶어요. 저 역시 같이 위로를 받는거죠. 그런데 이건 저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모여야죠.
예를 들어서 뜻이 맞는 분 중에서 캠핑카를 후원해주시거나 음향장비를 후원해주시면, 미국이나 유럽, 그 어디든 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곳을 찾아가서 맘껏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에스카사 독자분 중에도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이 계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정세훈’ 인생 무대가 보여줄 새로운 5막을 기다리며…..
안드레아 보첼리 이탈리아의 테너이자 팝페라 가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사라 브라이트 만과 듀엣으로 부른, 'Time to Say Goodbye'는 모두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곡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노래 하나로 국위 선양을 톡톡히 한 셈이다.
우리나라엔 세계 최초로 '팝페라’라는 신조어를 만든 ‘키메라’가 있다. 키메라 덕분에 '팝페라' 장르의 종주국이 된 대한민국엔 팝페라를 국내에 크게 유행시키고 정착시킨 ‘정세훈’이 있다. 정세훈은 영화 ‘파리넬리’에서 여성 목소리 대신 사용한 기계음이 아닌, 그의 목소리만으로 여성과 남성 목소리를 완벽하게 낼 수 있다. 현재까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의 허락을 받은 재능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의 반도 다 보여주지 못했다.
정세훈은 내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다. 국내보다는 국외 팬들이 더 인정하고 열광하는 카스트라토 팝페라 가수 정세훈! 그가 세계무대 정상을 향해 더 달려야 할 이유이다.
글 Jennifer Lee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
내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 콘서트 무대를 준비하는
신이 허락한 목소리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내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POPERA CASTRATO
SEHUN JUNG
대한민국 최초 팝페라 가수로 최정상에 섰던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그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마치 꿈을 꾼 듯 유명해졌고 연극과 같은 삶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신이 허락한 그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팝페라는 '팝(pop)'과 '오페라(opera)'의 합성어로, 오페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대중화한 오페라를 가리킨다. 정세훈은 기계음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로 여성의 음성과 남성의 음성 모두를 완벽히 표현한다. 대중은 신비로운 그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 정세훈을 찾는 이가 점점 늘어나자 그는 자신을 돌아보거나 쉴 틈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은 듯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의 유명한 대사를 통해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다. 어떤 이는 일생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고 말했다. 정세훈에게도 7막에 걸친 인생길을 가려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신의 암시였을까? 한 번뿐인 인생은 내가 선택한다지만, 어느 날 스타가 되었듯이 때로는 뜻하지 않게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듯 무심하게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소중함이 더 빛나는 게 인생이다.
신은 멈출 줄 모르는 정세훈에게 잠시 쉼을 허락했다. 물론 유명세를 치른 고통은 몸무게가 10킬로 이상이 빠져나갈 정도로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 온 뒤 굳어진 땅처럼 그는 시련과 고통을 겪은 뒤 더 단단해졌다. 작년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상해사범대 음악대학 객원교수가 됐다. 내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단독 콘서트도 가질 예정이다. 7월 중순, 예술의 전당 무대를 앞두고 뉴욕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만나 지난 얘기를 나눠보았다.
제1막 오늘의 정세훈이 있기까지
“소름이 돋았다.”, “환상적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 정세훈의 공연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 2001년 12월 정세훈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역으로 데뷔하여 2004년 1집 정규앨범 Comfort, 2005년 크리스마스 앨범, 2008년 2집 정규앨범 NeoClassic을 발매한 뒤, 대한민국에 팝페라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오페라 아리아부터 뮤지컬,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는 음악적 역량을 지닌 정세훈을 언론에서는 한국의 ‘파리넬리’라 불렀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뒷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남자가 내는 여성 음색으로 팝페라 열풍을 일으키신 게 쉽지 않은 일이셨을 듯합니다.
“지금도 생소하지만, 제가 대학을 다닐 때도 카운터테너나 카스트라토라는 단어조차도 생소했거든요. 그나마 영화 ‘파리넬리’가 나와서 ‘남자도 저런 목소리가 나는구나.’ 겨우 이해하는 정도였어요. 대학교 때 합창 클래스 시간에 여성 단원들 목소리가 고음에서 못 나오면 제가 그냥 장난삼아서 냈는데 여자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선배나 동료들이 우스갯말로 재수 없다고 했어요. 이렇듯 국내에서는 제목소리가 인정을 못 받았지요. 그런데 토론토에 유학을 가서는 이 소리로 어디서든 노래를 불렀어요. 지하철도 예외는 아니었죠.
본래 ‘내가 노래를 잘하는구나!’ 착각하는 공간이 목욕탕이랑 지하철이거든요. 소리가 울려서 들리고 노래를 못해도 잘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래서 몰래 ‘아베마리아’나 ‘울게 하소서’를 부르면 캐나디안이 막 달려와요. 그리고는 묻죠. ‘여기서 누가 노래한 거냐’고. 그러면 전 천연덕스럽게 ‘아니 난 모른다’ 시침을 뗐어요. 만일 남자 목소리였으면 ‘아 이 사람이었겠구나.’ 했겠지만 생긴 건 분명 남잔데, 나오는 건 여자 목소리니까 더는 안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가면 저 혼자 흥얼거리면서 또 노래하죠.
그럼 또 오고…. 결국 내가 부른 걸 알고 나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I don’t believe it!” 하더라고요. 제 목소리를 들으신 국내분과 외국 분이 받는 느낌이 달라요. 국내분들은 카운터테너나 저의 목소리에 대해서 ‘신비롭다’라거나 ‘신기하네’ 정도지만, 유럽이나 미국 같은 국외에서 노래하면 신비롭기도 하지만, 동양 사람의 소리를 경이롭게 생각하는 이점이 있더군요.”
정세훈은 노력하는 카스트라토? 카운터테너? 정확히 어떤 목소리죠?
“카스트라토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신의 축복인 거죠. 저 같은 경우는 가성이 아니라 진성에 의해 나오는 목소리에요. 카운터테너(영어: countertenor)는 여자 음역인 콘트랄토나 메조소프라노 음역을 노래하는 남자 성악가를 말합니다. 저는 여성 알토의 음역에 해당하는 부드러운 테너의 음성을 지닌 카운터테너만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도 내기 때문에 ‘팝페라 카스트라토’라는 명칭을 쓰고 있습니다.”
캐나다 유학 시절부터 꽃을 피운 목소리라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노래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까지 성악을 공부했어요. 유학을 다녀와서 최고의 성악가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3대째 기독교 집안이어서 가스펠(gospel)을 공부하기로 맘먹고 캐나다로 갔어요. 그런데 운명이 참 묘해요. 제가 토론토에 도착하자, 가스펠 학교가 재정상 문제로 문을 닫은 겁니다. 캐나다에 계속 머물러야 하나 돌아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캐나다 가요제’에 나갔어요. ‘꽃밭에서’를 불러서 대상을 받았죠. 그 일이 제 인생의 시발점이 된 겁니다. 같이 입상했던 친구 중 하나가 JK 김동욱이었어요.”
제2막 최정상의 정세훈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 곡에 특별한 애정이 있으신 듯해요. “가요제 대상을 받고 나자 사람들한테 없는 걸 내가 가지고 있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계속 이 길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고민이 됐어요. 대부분 클래식 하는 사람이 갖는 착각인데 자기 소리가 최고라고 생각하죠. 어려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서인지 객관적으로 보질 못해요. 내 소리가 상대방에게도 정말 좋은지 객관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거든요.
아무튼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를 녹음해서 서울대 음대 김인혜 교수님한테 보냈어요. ‘내가 이런 소리를 가졌는데 이쪽으로 계속 가야 할지 고민이 많으니 조언을 해주세요.’ 라는 편지도 넣었죠. 그런데 ‘특이하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답이 왔어요. 그때 마침 가요제 부상으로 받은 게 항공권이었어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간단히 짐을 챙기고 한국으로 가서 김인혜 교수님을 만나고 레슨을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친하게 지내지만, 그때만해도 무척 어려운 분이셨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고맙게도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는 카운터테너를 지도하실 선생님이 없으니 유학이나 바로 활동을 해라’고 하셨어요.
저는 내심 대학원을 편입해서 선생님께 배우면 어떨까 생각을 했었는데 선생님께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지도할지, support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던 중에 운이 좋게도 ‘오페라의 유령’ Raoul 역인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었어요.”
‘정세훈’ 인생의 절정기가 시작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얘기를 더 해주시죠.
“저에겐 운명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절 아껴주시는 모 교수님이 ‘너는 남자 목소리도 좋으니까 라울 백작 오디션 한번 봐봐’ 하셨어요. 오디션을 봤는데 느낌이 좋더군요. 바로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었어요. 2001년 12월의 일입니다. 그 뒤부터 제 생활 패턴이 바뀌더군요. 바로 서울 음반과 계약을 맺고, 앨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도 제 무모한 용기가 또 고개를 들었어요. 처음 나온 앨범이 맘에 안 들더군요.
당시 내노라하는 작사, 작곡가가 만들어서 노래는 사실 듣기 좋았어요. 그런데 전 ‘이건 아니다. 이건 정세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요에다 아무 목소리만 얹어도 되는 거라서 팝페라가 아니다. 그러니 나한테 ‘프로듀서 권한을 주던지 날 놓아달라’고 얘기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건방을 떤 거죠. 지금은 오페라도 공연이나 뮤지컬 공연도 많지만, 당시는 활발하지는 않았어요.
우리나라 대형 뮤지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게 오페라의 유령이에요. 그 공연이 6개월 동안 대박이 나고 흥행을 하고 뮤지컬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라서 부린 호기라고 할까요?”
대박을 터트린 1집 Comfort, 2집 Neo Classic 앨범 얘기 좀 들려주시죠.
“서울 음반에서 쿨하게 내보내 주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음반입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래서 제 음악을 좋아했던 분이 1집을 프로듀서 해서 소위 대박이 났습니다. 컴포트(Comfort)앨범은 아직도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으니까요. 드라마 OST부터 해서 클래식 차트 1위 크로스오버 팝페라 차트 1위. 1위란 1위는 다 쓸어 담았으니 확실한 대박이죠. 2집 역시 과분하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2집 Neo Classic에 수록된 뮤지컬 넘버 "All I ask of you"에서 라울과 크리스틴을 동시에 소화해 냈는데 고맙게도 아직도 세계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곡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는 다른 분이 부른 걸 들어도 정세훈이 연상됩니다.
“뉴욕 2005년도에 카루소 재단으로부터 ‘세계를 위한 천사의 목소리 상’을 받게 해준 곡이 ‘울게하소서’예요. 또 제가 카스트라토의 길을 걷게 해준 곡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죠. 많은 분이 사랑해 주시는 곡이기도 하고요. 이 곡 외에도 앨범에 들어있던 모든 노래가 다 애정이 가요. 그중에서도 ‘정세훈’ 하면 ‘아베마리아’나 ‘울게 하소서’를 떠올리시는 분이 많으셔서 더 자주 부르게 됩니다.
팝페라라는 장르가 말 그대로 팝과 오페라이기 때문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분과 아닌 분까지도 다 만족시켜야만, ‘진정한 팝페라’, ‘크로스오버’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요에다가 클래식 목소리만 얹는다고 팝페라가 아닌 거죠.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트랙에 거는 순간,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끝났다는 평가도 받았어요. 모든 게다 잘 맞아떨어져서 성공한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제3막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
오후에 있을 뉴욕 공연 리허설로 바쁜 와중에 잠시 전화로 이뤄진 인터뷰는 얼굴을 대하며 진행하는 것보다 더 진솔했다. ‘예술의 전당’ 공연에 맞춰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몸과 마음이 바쁜 그 였지만, 최선을 다해 기자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휴대전화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대한 열정만큼, 상대에 대한 배려심은 차고 넘쳤다. 부모님에게 배운 타고난 겸손이었다. ‘언론에 나왔다고 다 진실은 아니다’라는 전제로 그가 겪었던 ‘지난 사건’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이젠 다 지난 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그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세상을 떠나고 싶더군요.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건, 일반인이 겪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공인으로서 받아야 하는 고통과 시선은 상상 이상으로 더 크거든요.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벌써 전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인 기피증과 우울증으로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가장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었을 때 모든 걸 다 잃었다는 상실감은…… (그의 말소리는 자주 끊어지고…. 생각에 젖는 게 느껴졌다. 공연한 질문을 했구나 싶었다.)정말…… 모든 걸 다 잃었죠. 어찌하건 일어서 보려고 저 자신을 다독였어요. 그러나 일어서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절 고꾸라지게 만들더군요. 출연 요청을 받은 프로에서 세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 음악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고통은 제가 지고 갈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마음먹으니 그때부터 편해졌어요. 당시 새 앨범 ‘네오 클래식’이 발매됐지만, 한국 활동을 다 접고 프랑스·일본 등에서 공연을 하면서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세계를 다니다 보니 국내 기사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더군요.”
어머니 그리고 내 노래를 사랑하는 팬클럽 ‘꿈꾸는 섬’
“어머니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하신 분입니다.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제 길을 가도록 도와주셨죠. 또 팬클럽 ’꿈꾸는 섬’ 카페 분들의 응원은 큰 위로가 됐어요. 계약 때문에 일본에서만 공연할 수밖에 없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보통 때 73kg이던 몸무게가 63kg까지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젤 힘들 때 팬들이 일본까지 와서 맨 앞에 앉아 응원해주고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음악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죠.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노력했어요. 다시 바닥부터 간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보니좋은 일이 하나둘씩 생기더라고요.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제4막 끝나지 않은 그의 인생, 새 막이 열리다
영영 다시는 노래를 못 할 줄 알았다는 정세훈. 그가 다시 일어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상해 사범대 즉 우리나라의 국립대 음대 초빙교수 격인 객좌교수가 되었다. 외국인이 국립대 초빙교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시진핑 주석의 부인인 가수 펑리위안 여사와 정세훈 둘 뿐이라고 한다.
외국인 최초 중국 국립대음대 객좌교수가 되셨습니다. 과정을 듣고 싶군요.
“중국에는 경극이라는 전통공연이 있어요. 중국인들이 무척 좋아하죠. 경극 배우들이 내는 소리가 고음이거든요. 새소리처럼 내는 러시아가수가 중국에서 그 음성으로 이미 성공을 했어요. 그런데 노래가 아니고 괴성에 가까우니까 노래를 하는 저를 필요로 한 겁니다. 중국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경극을 현대화하는 중에 적합한 사람을 찾은 거죠. 제가 경극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는 소문이 나서 중국 북경과 상해 대학 두 군데서 연락이 왔어요.
시대가 변했어요. 예전엔 교수가 되려면 박사를 취득해야 하고 어렵게 되는데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스카우트했다고 학교 측에서 얘기하더군요. 고음을 내는 남성이 장르를 어떻게 크로스오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대중화할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교수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연락이 왔을 때 대신 조건을 맞춰달라고 했어요. 학교 측에서 학교에 상주하거나 한 달에 몇번씩 갈 수는 없다는 제 요구를 다 들어주더군요.”
인간미가 넘치고 사람 좋아하는 정세훈 곁에는 유독 친구가 많다
“팝페라도 클래식컬한 공연이니 지루해요. 그래서 늘 노력하죠. 부드러움 속에 때로는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고음으로 감동을 선사하고 싶어요. 신이 저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음성으로 위로를 드리고 상처받은 영혼엔 치유의 경험도 드리고 싶거든요. 전 제 공연에 오시는 분들에게 전율이 오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웃음도 드리고 싶어요. 가끔 감동보다는 웃음으로 관객을 쓰러뜨리기도 하죠. 이런 저를 친구나 지인들은 개그맨이라고 해요. 이런 철부지 행동 때문인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좀 많은 편입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나 꿈은 무엇입니까?
“정말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한 일 년 동안만이라도 세계 곳곳에 소외되고 문화적인 생활을 접하기 어렵고 생활이 힘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다니면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 음악으로 그분들에게 힐링을 드리고 싶어요. 저 역시 같이 위로를 받는거죠. 그런데 이건 저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모여야죠.
예를 들어서 뜻이 맞는 분 중에서 캠핑카를 후원해주시거나 음향장비를 후원해주시면, 미국이나 유럽, 그 어디든 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곳을 찾아가서 맘껏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에스카사 독자분 중에도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이 계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정세훈’ 인생 무대가 보여줄 새로운 5막을 기다리며…..
안드레아 보첼리 이탈리아의 테너이자 팝페라 가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사라 브라이트 만과 듀엣으로 부른, 'Time to Say Goodbye'는 모두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곡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노래 하나로 국위 선양을 톡톡히 한 셈이다.
우리나라엔 세계 최초로 '팝페라’라는 신조어를 만든 ‘키메라’가 있다. 키메라 덕분에 '팝페라' 장르의 종주국이 된 대한민국엔 팝페라를 국내에 크게 유행시키고 정착시킨 ‘정세훈’이 있다. 정세훈은 영화 ‘파리넬리’에서 여성 목소리 대신 사용한 기계음이 아닌, 그의 목소리만으로 여성과 남성 목소리를 완벽하게 낼 수 있다. 현재까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의 허락을 받은 재능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의 반도 다 보여주지 못했다.
정세훈은 내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다. 국내보다는 국외 팬들이 더 인정하고 열광하는 카스트라토 팝페라 가수 정세훈! 그가 세계무대 정상을 향해 더 달려야 할 이유이다.
글 Jennifer Lee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