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주제로 진솔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연재는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남에게 나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딸에게 아빠의 살아온 삶을 말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딸이라는 듣는이를 잠깐 빌려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삶은 이야기를 써 내려 가는 것이기에, 기억을 모아보면 몇 권의 스토리 북이 됩니다. 독자는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한 사람의 살아온 삶을 만나고, 경험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이해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지난겨울, 아빠가 홀로 한국에 다녀왔었지. 내가 가족과 함께 가지 않은 이유는 혼자 누군가를 찾고 싶어서였어. 그 사람은 나의 친아버지란다. 내가 아는 것은 성이 김씨라는 것과 1970년도에 동작경찰서 노량진 파출소에서 교통계 경찰관으로 근무했다는 사실 밖에 없었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같이 느껴졌어.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풀지 못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몹시 추운 겨울이었단다. 나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시장 모퉁이에 자리 잡은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어. 엄마 (너에게는 시골 할머니지) 배 안에 있던 내가 많이 컸었나 봐. 그래서 엄마가 나를 낳을 때 아주 힘들었다고 하더라. 엄마 곁에는 한 살 어린 이모가 분만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지. 아무리 진통을 해도 애가 나오지 않아서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단다. 의사는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엄마가 고집을 부렸었나 봐. 아이도 살려야 한다고.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몇 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단다. 긴 밤이 지나고 새벽 동이 틀 무렵, 오랜 산고 끝에 엄마는 나를 혼자 낳았어.
당시, 내 엄마는 스물네 살 먹은 젊고 아리따운 분이었단다. 태어나 줄곧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 엄마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마땅한 기술이 없어서 옷을 만드는 조그만 사업장에 취직했단다. 온종일 일하느라 힘이 들었지만, 작지만 소중한 월급을 받을 수가 있어서 감사했었지. 더구나, 엄마 눈에는 높은 건물과 세련된 서울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게 보였다고 하더라.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엄마는 우연히 길에서 한 멋진 청년을 만나게 되었어. 경찰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늠름하고 남자답게 보였단다. 엄마가 살던 동네 인근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교통경찰이었어. 그 후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게 되었지. 시골에서 순박하게 살던 엄마에게는 처음 느껴보던 설렘이었을 거야. 사랑을 시작하게 된 후 모든 게 달라 보이고 하루하루 삶이 행복했다고 하더라. 평생 제대로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엄마에게도 인생의 봄날이 찾아온거였어.
그러던 몇 달 후 엄마가 나를 임신하게 되었어. 모든 게 순탄해 보였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게 되었잖아. 그런데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그 경찰관이 연락을 끊은 거야. 찾아오지도 않고, 만나주지도 않았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그 경찰관은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와 가정이 있는 분이었어. 잠깐의 짧은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던 거야.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출산한 후 엄마는 작은 판잣집 쪽방에서 살게 되었어. 판자로 막은 방이다 보니 옆 방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릴 수밖에 없었지. 신기한 건, 내가 전혀 울지 않았었데. 만약 그랬다면, 다음날 엄마와 나는 쫓겨났을 거야. 옆방에 있는 사람들이 잠을 못 자서 항의를 많이 했을 테니까. 누추한 작은 방에 불과했지만, 엄마는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이 무척 감사했다고 하더라.
그해 겨울은 매우 추웠단다. 갓난아이를 가진 엄마는 먹고 살길이 막막했었지. 아이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아이를 봐 줄 사람도 없고 또 맡길 육아시설도 없던 시절이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엄마는 동네 근처에 있는 제과 도매점에서 껌을 사서 다방을 전전하며 팔기로 했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 용기를 낸 거지. 아니면 다른 길이 전혀 없었어. 고향 부모님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홀연 단신 서울에 올라온 터라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척도 없었던 거야
다행히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었어. 키 작은 엄마가 커다란 아이를 업고 다니며 껌을 파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애처로워 보였던 거지. 다방 손님들이 껌 한 통에 50원도 주고 100원도 줘서 남은 돈으로 근처 공장에서 국수를 사다 끓여 먹고, 기저귀와 분유를 사서 갓난아이였던 나를 키웠단다. 마땅히 기저귀를 갈 곳이 없으니까, 길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 엄마는 돈을 아껴야 해서 종종 점심도 거른 적이 많았어. 버스를 타고 갈 때는 조그만 엄마가 덩치 큰 아이를 업고 다니니까 많이 받아주고 그랬나 봐. 그땐 내가 토실토실하게 생겼었거든. 그런데 겉모습과는 달리, 내가 몸이 약해서 늘 병원을 달고 살았어. 아마 엄마는 돈 벌어서 병원비로 다 쓰셨을 거야. 그래서인지 내가 아직도 몸이 약한가 봐.
지금도 나는 엄마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어. 그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 큰 가방에 돈을 잔뜩 담아와서 돈을 줄 테니 갓난아이를 달라고 했었나 봐. 자기들이 입양해서 키우겠다고. 엄마는 다시 처녀로 시집가면 되니까. 엄마는 그 사람들을 호통쳐서 돌려보냈다고 해. 또 엄마는 나를 입양하는 기관에 맡겨서 멀리 미국이나 유럽에 입양도 시키지도 않았어. 특히 미혼모에게 태어난 아이가 외국으로 많이 입양되던 시절이었단다. 만약에 나를 입양시켰으면 엄마의 삶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었겠지. 하지만, 아이가 너무 소중했고, 다른 사람에게 애를 키우게 입양시키고는 하루도 잠을 편히 자지 못할 것 같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는 아이를 혼자 꿋꿋하게 키우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야.
내가 자라면서 내내 가난하고 힘들었단다. 하지만, 엄마의 헌신과 사랑 덕분에 무럭무럭 잘 클 수가 있었어. 가끔은 잘 먹지도 못하고,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차라리 부잣집에 입양해서 컸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원망도 한 적이 있었어. 종종 어떤 멋진 신사분이 검은색 자가용을 몰고 와서 나를 데려가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단다.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지. 그러면 엄마와 행복하게 크지 못했을 거야. 가난해도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가장 좋은 거잖아. 가족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
지난겨울 난 아빠를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단다. 동작경찰서에 가서 경찰관들과 경찰원우회 회장님도 만났지만, 엄마가 그 경찰관의 정확한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찾지 못한 거였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한 적도 있어. 아무리 사십 몇년 전의 일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걸 기억하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억지로 더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경찰서를 뒤로하고 걸어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구나.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더라고. 아마 그 경찰서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후회했을지도 몰라.
난 한 번도 친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지. 만나면, 화를 내거나 탓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냥,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그리고 “아주 잘 성장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했을 거야. 그리고 어떤 병이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그래야 내가 예방할 수가 있잖아.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가족질병을 물어보는데 뭘 알아야 대답을 하지. 그게 좀 아쉽더라고.
살다 보면 내가 원치 않는 환경에 내가 놓여 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단다. 태어난 배경도, 경제환경도, 건강도, 사람과의 관계도 내게 우호적이지 않을 때가 있어. 절망하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삶은 그래도 살아갈 이유가 있단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너무 쏟지 않는 게 좋더라고.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거든.
지난 며칠 동안 날씨가 꽤 추웠어. 겨우내 포근했는데 역시 겨울은 겨울인가 봐. 눈도 많이 오고 땅도 얼어붙었지. 날이 추워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잖아. 겨울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잠시 추위를 견디는 거야. 곧 봄이 오고 꽃이 핀단다. 얼어붙은 땅도 따뜻한 햇볕에 녹아내리고 생명을 키워낼 준비를 하게 되지. 지금 잠깐 너무 추워서 그게 안 보일 뿐이야. 늘 봄은 우리에게 반갑게 찾아온단다.
S.CASA 편집부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주제로 진솔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연재는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남에게 나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딸에게 아빠의 살아온 삶을 말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딸이라는 듣는이를 잠깐 빌려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삶은 이야기를 써 내려 가는 것이기에, 기억을 모아보면 몇 권의 스토리 북이 됩니다. 독자는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한 사람의 살아온 삶을 만나고, 경험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이해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될 것입니다.
지난겨울, 아빠가 홀로 한국에 다녀왔었지. 내가 가족과 함께 가지 않은 이유는 혼자 누군가를 찾고 싶어서였어. 그 사람은 나의 친아버지란다. 내가 아는 것은 성이 김씨라는 것과 1970년도에 동작경찰서 노량진 파출소에서 교통계 경찰관으로 근무했다는 사실 밖에 없었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같이 느껴졌어.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풀지 못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몹시 추운 겨울이었단다. 나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시장 모퉁이에 자리 잡은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어. 엄마 (너에게는 시골 할머니지) 배 안에 있던 내가 많이 컸었나 봐. 그래서 엄마가 나를 낳을 때 아주 힘들었다고 하더라. 엄마 곁에는 한 살 어린 이모가 분만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지. 아무리 진통을 해도 애가 나오지 않아서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단다. 의사는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엄마가 고집을 부렸었나 봐. 아이도 살려야 한다고.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몇 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단다. 긴 밤이 지나고 새벽 동이 틀 무렵, 오랜 산고 끝에 엄마는 나를 혼자 낳았어.
당시, 내 엄마는 스물네 살 먹은 젊고 아리따운 분이었단다. 태어나 줄곧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 엄마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마땅한 기술이 없어서 옷을 만드는 조그만 사업장에 취직했단다. 온종일 일하느라 힘이 들었지만, 작지만 소중한 월급을 받을 수가 있어서 감사했었지. 더구나, 엄마 눈에는 높은 건물과 세련된 서울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게 보였다고 하더라.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엄마는 우연히 길에서 한 멋진 청년을 만나게 되었어. 경찰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늠름하고 남자답게 보였단다. 엄마가 살던 동네 인근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교통경찰이었어. 그 후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게 되었지. 시골에서 순박하게 살던 엄마에게는 처음 느껴보던 설렘이었을 거야. 사랑을 시작하게 된 후 모든 게 달라 보이고 하루하루 삶이 행복했다고 하더라. 평생 제대로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엄마에게도 인생의 봄날이 찾아온거였어.
그러던 몇 달 후 엄마가 나를 임신하게 되었어. 모든 게 순탄해 보였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게 되었잖아. 그런데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그 경찰관이 연락을 끊은 거야. 찾아오지도 않고, 만나주지도 않았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그 경찰관은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와 가정이 있는 분이었어. 잠깐의 짧은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던 거야.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출산한 후 엄마는 작은 판잣집 쪽방에서 살게 되었어. 판자로 막은 방이다 보니 옆 방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릴 수밖에 없었지. 신기한 건, 내가 전혀 울지 않았었데. 만약 그랬다면, 다음날 엄마와 나는 쫓겨났을 거야. 옆방에 있는 사람들이 잠을 못 자서 항의를 많이 했을 테니까. 누추한 작은 방에 불과했지만, 엄마는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이 무척 감사했다고 하더라.
그해 겨울은 매우 추웠단다. 갓난아이를 가진 엄마는 먹고 살길이 막막했었지. 아이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아이를 봐 줄 사람도 없고 또 맡길 육아시설도 없던 시절이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엄마는 동네 근처에 있는 제과 도매점에서 껌을 사서 다방을 전전하며 팔기로 했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 용기를 낸 거지. 아니면 다른 길이 전혀 없었어. 고향 부모님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홀연 단신 서울에 올라온 터라 마땅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척도 없었던 거야
다행히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었어. 키 작은 엄마가 커다란 아이를 업고 다니며 껌을 파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애처로워 보였던 거지. 다방 손님들이 껌 한 통에 50원도 주고 100원도 줘서 남은 돈으로 근처 공장에서 국수를 사다 끓여 먹고, 기저귀와 분유를 사서 갓난아이였던 나를 키웠단다. 마땅히 기저귀를 갈 곳이 없으니까, 길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 엄마는 돈을 아껴야 해서 종종 점심도 거른 적이 많았어. 버스를 타고 갈 때는 조그만 엄마가 덩치 큰 아이를 업고 다니니까 많이 받아주고 그랬나 봐. 그땐 내가 토실토실하게 생겼었거든. 그런데 겉모습과는 달리, 내가 몸이 약해서 늘 병원을 달고 살았어. 아마 엄마는 돈 벌어서 병원비로 다 쓰셨을 거야. 그래서인지 내가 아직도 몸이 약한가 봐.
지금도 나는 엄마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어. 그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 큰 가방에 돈을 잔뜩 담아와서 돈을 줄 테니 갓난아이를 달라고 했었나 봐. 자기들이 입양해서 키우겠다고. 엄마는 다시 처녀로 시집가면 되니까. 엄마는 그 사람들을 호통쳐서 돌려보냈다고 해. 또 엄마는 나를 입양하는 기관에 맡겨서 멀리 미국이나 유럽에 입양도 시키지도 않았어. 특히 미혼모에게 태어난 아이가 외국으로 많이 입양되던 시절이었단다. 만약에 나를 입양시켰으면 엄마의 삶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었겠지. 하지만, 아이가 너무 소중했고, 다른 사람에게 애를 키우게 입양시키고는 하루도 잠을 편히 자지 못할 것 같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는 아이를 혼자 꿋꿋하게 키우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야.
내가 자라면서 내내 가난하고 힘들었단다. 하지만, 엄마의 헌신과 사랑 덕분에 무럭무럭 잘 클 수가 있었어. 가끔은 잘 먹지도 못하고,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차라리 부잣집에 입양해서 컸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원망도 한 적이 있었어. 종종 어떤 멋진 신사분이 검은색 자가용을 몰고 와서 나를 데려가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단다.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지. 그러면 엄마와 행복하게 크지 못했을 거야. 가난해도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가장 좋은 거잖아. 가족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
지난겨울 난 아빠를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단다. 동작경찰서에 가서 경찰관들과 경찰원우회 회장님도 만났지만, 엄마가 그 경찰관의 정확한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찾지 못한 거였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한 적도 있어. 아무리 사십 몇년 전의 일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걸 기억하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억지로 더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경찰서를 뒤로하고 걸어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구나.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더라고. 아마 그 경찰서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후회했을지도 몰라.
난 한 번도 친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지. 만나면, 화를 내거나 탓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냥,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그리고 “아주 잘 성장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했을 거야. 그리고 어떤 병이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그래야 내가 예방할 수가 있잖아.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이 가족질병을 물어보는데 뭘 알아야 대답을 하지. 그게 좀 아쉽더라고.
살다 보면 내가 원치 않는 환경에 내가 놓여 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단다. 태어난 배경도, 경제환경도, 건강도, 사람과의 관계도 내게 우호적이지 않을 때가 있어. 절망하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삶은 그래도 살아갈 이유가 있단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너무 쏟지 않는 게 좋더라고.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거든.
지난 며칠 동안 날씨가 꽤 추웠어. 겨우내 포근했는데 역시 겨울은 겨울인가 봐. 눈도 많이 오고 땅도 얼어붙었지. 날이 추워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잖아. 겨울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잠시 추위를 견디는 거야. 곧 봄이 오고 꽃이 핀단다. 얼어붙은 땅도 따뜻한 햇볕에 녹아내리고 생명을 키워낼 준비를 하게 되지. 지금 잠깐 너무 추워서 그게 안 보일 뿐이야. 늘 봄은 우리에게 반갑게 찾아온단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