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카미노 산티아고를 걷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유럽에는 다양한 카미노 길이 있는데 한국에는 스페인을 걷는 ‘산티아고 길’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카미노’라 불리는 순례 길, 즉 프랑스 중남부를 가로지르는 ‘르퓌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도보 여행자를 한 명도 못 마주쳤는데 알고 보니 모두 여기 모여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지나고 있다. 그들은 이곳이 익숙해서 나에게 무덤덤할 수도 있겠지만 난 오랜만에 동행자를 만난 반가움에 감격스럽다. 그들 중 스위스인 리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취리히부터 이곳까지 걸어왔다. 우린 Conques 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났는데 그녀 역시 나처럼 모처럼 순례자를 만난 탓인지 나를 처음 본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만나자마자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던 우리는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처럼 금세 친해졌다. 이것이 ‘카미노’가 주는 마법이라면 마법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가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도보여행 두 달을 맞이한 그녀는 어딜 가든 '뭐? 스위스에서 걸어왔다고?' 하는 놀라움으로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이제 그녀는 그런 반응을 받으면 나를 가리키며 '얘는 벨라루스에서 걸어왔는데요?'라고 말해준다. 나와 리사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목을 집중시키며 카미노의 신예로 떠올랐다. 나는 리사에게 이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다그쳤고 리사는 같이 부담을 나누자고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순례자의 숙소는 대부분 성당에서 운영했다. ‘카미노’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걷는 길이다 보니 성당이 지원해주는 성당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머물렀던 곳마다 우리를 축복해주길 원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면 성당으로 가서 신부님의 축복을 받아야 했다. 반나절을 힘들게 걷고 숙소에 도착해 배불리 식사를 마치면 지친 몸을 끌고 성당에 갔다. 우리에게 준 축복에 감사하며 경건한 종교의 기운에 젖곤 했다.



유럽의 웅장한 성당에서 하는 미사는 성스러웠다. 성당 곳곳에 울려 퍼지는 오르간 연주는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남들은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성당을 하루가 멀다고 가다 보니 이건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되짚고 싶은데 늘 성당에서 미사를 들어야 하니 불만이 쌓인 것이다. 축복도 과잉은 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은 축복을 받은 우린 지쳐가기 시작했고 5일째가 되자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리사와 가위바위보에서 진 나는 얼떨결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 미사를 피하고자 둘 중 한 명이 무슬림이 되기로 한 것이다. 생전코란 한 번 만져본 적 없는 나는 그렇게 알라신을 믿는 무슬림이 되었다. 심지어 저녁 식사 중 내가 돼지고기를 먹으려고 하면 리사에게 눈총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내가 무슬림이라고 밝히면 대부분 사람은 당황해했으며 경계하는 눈치를 보이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무슬림이 되었고 다행히 돼지고기를 못먹는다는 점을 빼면 그렇게 불편한 건 없었다.


알라신의 가호를 받은 지 이틀째, 리사와 나는 성당 근처에 마련된 숙소에 도착했다. 예전과 똑같이 좋은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따뜻한 잠자리를 받고 숙소 옆에 있는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식사했다. 식탁에 앉아 우리는 여행 얘기를 했다. 주인 할머니는 매우 놀라시며 벽에 붙은 거대한 지도를 가리켰다. 그녀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느나라를 거쳤는지에 관해 물으셨다. 내가 지도 위에 있는 나라를 짚을때마다 한없이 자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곤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에 축복을 주고 싶다며 성당으로 가자고 했다. 리사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 공간을 이용해 슬쩍 나를 찼다. ‘아, 나도 거짓말하기 힘들어. 그냥 가자.’라는 눈빛을 리사에게 보냈다. 하지만 독실한 무신론자였던 리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이 나는 할머니에게 정중히 ‘사실 저는 무슬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난 뒤에 기대되는 반응들이 있다. 늘 그랬듯이 당황과 경계그리고 어색한 공기 말이다. ‘네가 왜 무슬림이야?’라는 표정, ‘너는 우리랑 다르구나!’라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말투. 나는 그런 것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떨궜다. 또 그렇게 흘러갈 거로 생각하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할머니께선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리고 입을 여셨다. “다 괜찮아. 네가 무엇을 믿든 너를 축복해주고 싶구나.”


나는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지긋이 나를 보고 있었다. 리사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그 날 누군가로부터 나는 ‘축복’을 받았다.


여태껏 나는 종교관이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았고 정치관이 다른 이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흘려보내며 다름과 틀림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사실 나는 상처받기싫어 주머니 속에 손을 쏙 집어넣은 채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얄궂게도 삶이란 대단한 장난꾸러기여서 소중한 것들을 이곳저곳에 숨겨놓는다. 그래서 손을 뻗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역시 소중한 보석이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때 나는 다름과 틀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지 못했고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을 용기도, 마음씨도, 따뜻함도 없었다.


미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할머니의 손길이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제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성당에 가서 미사 드리는 게 뭐가 그렇게 귀찮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나는 왜 그동안 나와 다르다고 품에 안길 거부했던 걸까. 이런저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부디 그 손길, 머리칼 사이를 휘저었던그 순간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바랐다.


글 김동하

S.CASA 편집부